1885년 암울했던 여명기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유교사상과 남존여비, 내외법으로 인해 인식의 세계에서 노예와 억압의 세계로 사라져 갔습니다. 여성들은 집안에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삶을 제한하는 규범 및 제도적 공간에 매여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빨랫더미 속에서 여인들의 빨래하는 소리와 연신 방망이로 두들겨야 하는 다듬이질 소리를 선교사들은 “한국 어머니들의 숨소리”라고 했습니다.
이 숨소리에는 여성들의 부조리의 한, 인간상실의 한. 성차별의 한. 그리고 갈등의 한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의 여성은 아름답지 않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무지 수줍음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고 선교 본부에 보고했습니다. 여성들이 유교문화에 갇혀 남자 선교사들이 접근 못하는 상황이 도리어 준비되고 훈련받은 전문인 여성 선교사들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조선땅으로 부르셨고 여성들이 거주하는 집안 깊숙한 곳까지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기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에 주력했고 대상은 교육과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여성과 소외계층이었습니다. 1912년 조선에 온 독일계 미국인 여성 선교사 서서평은 당시 이름도 없는 조선 여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미국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 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명도 안되었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엄마, 큰년이, 작은년이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저에게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한국 여성 교육의 첫걸음

한국 여성을 위한 선교와 교육이 시작된 계기는 미국 오하이오에 사는 루신다 B 볼드윈 부인이 “이름조차 갖지 못한 조선땅의 소녀와 여인들에게 쓰여지기를 바란다며 드린 헌금 88달러가 특별히 한국 여성을 위한 선교와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Seed Money 88달러로 시작된 한국 여성 교육이 어떻게 열매 맺어 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머니 선교사 한 사람의 사랑과 헌신과 한 여인이 드린 88달러가 Seed Money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여성교육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교육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은총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명기 조선 땅에 한줄기 복음의 빛이 비치자 유교사상에 억눌렸던 여성들이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서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는지를 자각했고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여학교를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 양성과 가정의 어머니를 훈련시키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가정 안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을 새로운 공간으로 불러내고 여성의 의식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자아를 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배움을 통해 문자의 세계로 들어간 여성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삶의 존재의미를 깨닫고 가정과 사회와 한국 역사의 장에 참여함으로 여성 리더십의 사회적 확장이 일어났고 여성들의 정신적 리더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교육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전통적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통로를 교육에서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벽안의 어머니 선교사 메리 스크렌턴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부인은 선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를 지난 53세때 “조선여성들에게 할일이 있다”며 선교사 아들을 따라 조선에 왔습니다. 어느날 서대문을 지나가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은 채 가마니 위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 선교사에게 연락해 시병원으로 보내 치료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천사가 보낸 아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후 1886년 5월 자신의 집에서 여자 아이 한 명을 가르치며 문을 연 학교가 이화 학당이 되었고 명성황후가 이화라는 학교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스크렌턴 부인은 조선에 와서 버려진 여자아이들과 가난한 여성들에게 옷과 먹을것을 주었고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최초의 여학생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학생들의 평균연령은 12세 정도였는데 당시 여성들을 12-3세 정도에 결혼했고 비기독교인 가정으로 시집을 보내는 일도 허다해 선교사들은 기독교인 신랑후보를 물색해서 학생들의 중매를 서기도 했습니다. 이화학당에서 1908년 처음 고등과 졸업식을 거행할 때 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결혼식까지 주선해 주었으므로 졸업식은 결혼식과 같이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진 여성 한사람을 통헤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며 벽안의 여선교사들의 한국 여성 사랑은 놀랍고 감동스럽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사람들입니다. 당시 미션계 여학교의 교육목적은 “더 나은 조선 여성의 육성” 으로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가지고 온전한 한국인이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신성한 의무를 자녀양육에서 찾았으며 가정에서 남편의 진정한 반려자로 넓은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기독교적 품성을 갖춘 현모양처 교육과 여성의 삶의 중심인 가정에서의 교육과 가정관리 습득 근대인의 생활 교육등이 있지만 중요한 교육목적은 선교였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도 가난한 여자 아이들과 고아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난한 여자 아이들과 차별받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어린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고 고아와 과부의 딸들이 먼저 기독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여성 선교는 고아와 과부를 환란중에 돌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은총의 현장이었습니다. (약1:27)



